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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가져갈 펜

기사승인 2024.01.18  00:3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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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은 요상한 물건입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이유가 다르고 구입하는 목적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먼저 수집이라는 목적이 확실한 한정판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이름만 들어도 두근두근하는, 파커 '스페인 보물'(침몰한 스페인 보물선에서 건져 올린 은으로 만듦)이 있고, 글이 저절로 써질 것 같은 몽블랑 작가 시리즈인 헤밍웨이와 오스카 와일드, 이탈리어로 바다를 뜻하는 이름에 딱 들어맞는 파란색 만년필 ‘마레’와 클립에 제비가 새겨진, 녹색 ‘프리마베라’는 봄을 뜻하는 오로라의 한정판입니다. 또 1930년대 전설적인 만년필을 당시의 분위기를 절묘하게 살려 복각한 ‘1931 톨레도’ 등은 구경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만년필들입니다. 

하지만 이 한정판 만년필들도 잘 써지지 않으면 쓸모없는 것입니다. “장신구”니 “개성을 표현하는 마지막 한조각”이라고도 하지만 만년필은 글씨를 쓰는 도구인 필기구입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몇 년에 한 번씩 제가 속하는 동호회에서 조사하는 ‘무인도에 가져갈 펜’으로는 필기구 본연에 충실한 진짜들이 등장합니다. 

그중 몇 개를 꼽자면

 
왼쪽부터
몽블랑 149, 파커 75, 파커51, 펠리칸 M800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몽블랑 149입니다. 몽블랑 149의 인기는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4년 전에 조사했을 때보다 더 많은 분이 149를 꼽아주셨습니다. 현대는 큰 펜촉 만년필 시대이고, 몸통 끝에 꼭지를 돌려 잉크를 넣는 피스톤 방식이 유행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49는 훌륭한 펜입니다. 여간해서 고장 나지 않는 펜촉, 제대로 닫아 놓으면 한 참 동안 마르지 않은 뚜껑, 잡았을 때 손에 착 달라붙는 감촉과 당당한 풍채는 이 시대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길들이기가 만만치 않아, 아주 오래 사용해야 길이 들지만 이런 점도 매력으로 바뀌는 마력(魔力)이 있는 만년필입니다. 

파커 75는 현재 생산되고 있는 만년필은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꼽아주셨습니다. 파커 75는 1964년(어떤 자료엔 1963년)에 처음 등장했고 1990년대 초반에 생산이 중단되어 약 30년 동안 생산된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역사에서 올 메탈(뚜껑과 몸통이 금속) 시대를 열었고, 필기감과 편리성 그리고 예쁜 글씨까지 쓸 수 있는 역사상 가장 진화한 만년필입니다. (참고로 몽블랑 149는 파커 75보다 약 10년 먼저 1952년에 나온 만년필입니다.) 이 만년필 역시 완벽에 가까운데, 잉크가 다소 덜 나오는 단점 때문에, 초심자들이 잉크 흐름을 늘리기 위해 펜촉에 칼날 등을 넣어 망친 게 많은 것이 흠입니다. 되도록이면 중고 보다는 새것을 구하는 것이 좋고 후기 산 보다는 1960~70년대 생산된 초기 산이 좋습니다. 

파커 51 역시 이번 조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습니다. 이번에 새로 나온 51이 기대만큼 품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인기가 조금 떨어졌지만 51은 명작임에 분명합니다. 왜냐면 1949년부터 나온 것들은 내구 면에서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부품을 교체할 필요 없이 30년 이상을 쓸 수 있는 만년필은 아직도 파커 51이 유일합니다. 단점은 이 역시 너무 많이 팔리고 너무 오랜 기간 생산된 것입니다. 중고의 대부분은 부품이 서로 섞인 것이 많고 비전문가들이 손댄 것들이 많습니다. 이 역시 다소 비싸도 새것을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1941년부터 1948년까지 생산된 것들은 수리가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펠리칸 M800은 역시 몽블랑 149처럼 현재 생산되고 있는 만년필 중 명작입니다. 때문에 이번 조사에 당연히 등장하였습니다. 몽블랑 149는 1952년에 처음 나와 지금까지 계속 생산되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명작은 1987년에 나온 펠리칸 M800입니다. 1987년에 나온 듀오폴드가 있지만 피스톤필러가 아닌 점에서 듀오폴드의 인기는 예전만 못합니다. M800의 단점은 장신구보다는 너무 필기구의 역할에만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진화가 필요하다면 좀 더 화려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이밖에도 몽블랑 146, 파커 45, 펠리칸 M400이 있었습니다. 모두 명작들이지요. 그런데 이 명작들의 진가(眞價)를 알려면 중고가 아닌 새것을 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만년필들이 고장이 나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마치 좋은 사람과 어쩌다 관계가 틀어지면 회복이 어려운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만년필은 사람을 정말 많이 닮았습니다. 

* '무인도에 가져갈 펜'의 조사는 2019년, 2023년 조사되었고, 조사 기간은 각각 3일과 일주일이었습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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