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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면장님

기사승인 2024.01.16  02: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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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는 시골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면 서기’라 부르지 않습니다. 1960년대 면 서기는 야릇한 기피 업종이었습니다. 낮에 면사무소에 가보면 지금의 민원실 격인 ‘호적계’에만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다른 계 직원들은 죄다 출장을 나갑니다. 

면 서기들이 출장을 나가는 이유는 많습니다. 그중에서 농작물 통계는 중요한 출장업무입니다. 각 면에서 재배하는 벼, 보리, 마늘, 콩, 고추 따위의 면적을 조사해서 군청으로 보고를 하는 업무입니다. 요즘처럼 드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 중턱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며 수작업하는 것도 아닙니다.

출장을 나가면 일단 이장 집으로 갑니다. 이장은 면 서기가 출장을 온다는 전갈을 이미 받은 뒤라서 면 서기가 도착할 즈음에는 씨암탉을 삶아 놓든지, 돼지고기를 끊어다 김치찌개나 수육을 삶아 놓고 기다립니다. 

이장 혼자만 면 서기를 접대하는 것이 아니고, 동네에서 목소리깨나 큰 한두 명이 안방에 앉아서 닭다리를 뜯으면서 술을 마십니다. 통계업무는 자연스럽게 이장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그렇다고 이장이 집마다 다니면서 작황을 조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에 일어나 방바닥에 누워 동네의 논밭 전경을 머릿속에 띄어 놓고 통계를 작성합니다. 당연히 정확하지 않은 통계가 나오고, 그 통계가 중앙으로 모아져 마늘값을 정하고, 콩값을 정하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됩니다.

통계가 끝나면 면 서기를 접대한 비용을 동네 사람들에게 청구할 차례입니다. 혼자만 면 서기하고 맛있는 고기에 술을 먹었다고 할 것 같아서, 이미 동네에서 목소리 큰 주민에게 보험을 들어 놓은 뒤라 적당히 웃돈을 붙여서 기록해 둡니다. 

이장 집에서 늘어지게 낮잠까지 잔 면 서기는 해가 기웃기웃 서산에서 윙크를 보내면 면사무소로 갑니다. 낮에는 이장의 상전이었다면, 야근하는 시간부터는 야근수당도 없는 3D 업종의 직원이 되는 겁니다. 

선거철에는 더 바쁩니다. 동네 이장들에게 고무신이며, 빨랫비누나 세숫비누를 자전거에 실어서 갖다 줘야 합니다. 수시로 저녁에 가서 여당 후보를 찍으라고 반협박 선거운동도 해야 하고, 동네 어르신 회갑, 초상, 결혼식 때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 하고, 길거리에서 만난 주민들의 민원도 들어줘야 합니다. 

요즘 지방공무원들은 면사무소와 군청을 오가며 순환 근무를 합니다. 면장은 군청의 과장급인 5급 직원이 발령을 받아 2년 정도 근무를 하다 군청으로 들어갑니다. 아래 직원들도 평균 2년 정도 근무를 합니다.
그 시절에는 한 번 면서기는 영원한 면 서기입니다. 웬만한 면 서기들은 이장보다 동네 사정을 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장 귀에 들려오는 정보 이상이 면 서기 귀에 들려오는 까닭입니다.

면 서기가 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군대에서 차트 병으로 근무를 해서 면 서기가 되기도 하고, 펜글씨를 잘 써도 임시직으로 1년 정도 근무를 하면 공무원이 됩니다. 이장 출신 면서기들은 흔합니다. 

자유칼럼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장터에는 색시들이 있는 술집이 두 곳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곳의 주인이자 마담이자 친정어머니를 모시는 딸이기도 한 그녀는 30대 후반이었습니다. 진주에서 왔다고 해서 ‘진주옥’이라는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면장이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쓴 대하소설 '금강'(전 15권)에 등장하는 부면장 이동하처럼 자전거를 타고 10리 길을 출퇴근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그릿고개’라는 꽤 큰 고개가 있어서 고개 초입에서 마루까지는 자전거를 끌고 가야 합니다. 요즘처럼 오토바이나 자동차가 흔한 시절이 아니니까 면장 체면에 자전거를 끌고 고개를 오르내리기가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진주옥 안방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진주옥 주인이 면장의 첩이라는 소문은 금방 들불처럼 번졌지만, 면장은 밤을 이용해 밤고양이처럼 진주옥을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면 소재지의 기관장들 회식은 당연히 진주옥을 이용했고, 군청에서 출장을 온 직원들도 진주옥에서 대접을 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겠지만 그 시절에는 면장을 나쁘게 보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면장 정도 되니까 경상도 사투리를 간드러지게 구사하는 첩을 둘 수 있다고 부러워하는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면장의 가족은 가장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면소재지에 있는 첩의 집에서 머무는 날이 많으니까 불만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논밭전지가 풍족해서 먹고사는 것은 지장이 없었는데, 첩에서 아들까지 얻고 나니까 큰아들이 술에 엉망으로 취해 진주옥에 와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아들 중 한 명이 저하고 중학교 같은 반이었는데 “야! 오늘 장터에서 공보실 영화하잖아. 영화 보고 작은엄마 집에서 하룻밤 자!” 하고 놀리기라도 하면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사생결단하자고 달려드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면장의 아버지는 대하소설 '금강'의 이동하처럼 일본인 지주의 마름이었습니다. 해방되고 일본인이 거의 헐값에 넘긴 논밭을 인수해서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 임시직으로 면사무소에 취직을 했던 면장은 6.25며 정국의 혼란기를 겪다 보니 젊은 시절에 면장이 되었습니다. 

면 서기들은  순환 근무가 안 되다 보니까 면장이 퇴직해야 승진이 됩니다.  면장이 오랫동안 면장직을 독식하고 퇴직하다 보니 후임 면장들은 나이가 들어서 4, 5년씩 근무를 하고 퇴직을 했습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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