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눈 내리던 날

기사승인 2024.01.15  01:36:04

공유
default_news_ad1

지난 연말엔 모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았다며 모두들 즐거워했었지요. 그래도 올겨울 아직 큰 눈은 없었던 편입니다. 한겨울 설경을 마다할 사람은 별로 없겠지요. 눈이 내리면 누구나 반가운 마음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눈다운 눈을 처음 본 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서울역에서였습니다. 고교 진학을 위해 처음 서울 땅을 밟았던 그날 지붕에 하얀 눈을 이고 선 남대문의 모습이 얼마나 웅장했던지요. 눈이라곤 내리다 녹아 사라지는 남녘에서 살다가 처음 마주한 서울의 설경은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눈이 불러일으키는 광경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입니다. 우선 도회에선 여기저기서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행인들이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며 다치는 일도 생기고, 차가 미끄러지며 부딪히고 도로가 막혀 고생하기도 합니다. 시골에선 이따금 너무 많은 눈이 쌓여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축사가 주저앉는 불행한 사고도 발생하지요.

제가 사는 한적한 동네 골목길 안에서는 뜻밖에 훈훈한 풍경이 연출되곤 한답니다. 창밖 빗자루질 소리에 놀라 뛰어 나가보면 이웃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먼저 나와서 눈을 치우느라 분주합니다. 함께 눈을 쓸다 보면 평소 자주 못 보아 데면데면하던 사이에도 자연스레 인사를 주고받게 됩니다. 좀 언짢은 일로 기피하던 사람과도 화안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지요. 눈이 암만 펑펑 쏟아져도 경비원 손길만 기다리는 아파트 마을 풍경과는 딴판입니다.

   

눈이 제법 많이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먼저 설치고 나섰다가 눈과의 싸움이 힘에 부쳐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한참이나 끙끙거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처음 눈다운 눈을 맞았던 옛날이 떠올라 눈사람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원래 재주가 없는 데다 맨손으로 차가운 눈을 만지다 보니 손이 곱아서 제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못생긴 눈사람을 들여다보며 혼자 킥킥거리는데 때마침 이웃집 할머니가 나타났습니다. “아이고, 누가 이렇게 예쁜 짓을 하노?” 팔순을 넘겨서도 고운 얼굴로 소문난 할머니가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칭찬인지 핀잔인지, 한마디 듣고 보니 눈과의 씨름을 그만둘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늦게까지 쏟아지는 눈이 밤새 쌓이면 어쩌나 싶어 연신 빗자루로 쓸어 보았지만 갈수록 눈발이 굵어져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침 자동차 기름걸레를 빨 때 쓰던 낡은 나무 빨래판이 생각났습니다. ‘옳지, 그걸로 넉가래를 만들어 볼까.’ 빨래판에 가느다란 각목 장대를 붙여서 나사못을 박아 눈가래를 만들었습니다. 생김새는 엉성했지만 그런대로 쓸 만했습니다. 

   

스스로도 신통하다 여기며 신나게 눈을 밀고 있는데 때마침 마주친 이가 “수고하십니다” 하고 인사하며 지나갑니다. 평소 본 적이 없던 사람이니 아마도 이웃에 사는 친지를 찾아가던 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참 후 그 길을 되짚어 지나가던 그이가 “추운데 이걸 끼고 하세요.” 하며 큼직한 장갑 한 켤레를 던지듯이 주고 갑니다. 미처 사양할 새도 없이. 두 손에 끼어보니 속에 두툼하게 털을 붙인 가죽장갑으로 추운 날 눈 치울 때 쓰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뜻밖에 낯도 모르는 이로부터 가죽장갑을 선물 받은 후로는 ‘눈이 언제 오나?’ 기다려지기도 합니다. 가죽장갑에 빨래판 눈가래, 얼마나 멋진 조화입니까. 이거, 내 목에 얹힌 멍에 아닌가 싶다가도 그 장갑을 끼고 눈 치울 생각을 하면 절로 유쾌한 기분이 됩니다. 한겨울 차가운 눈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드는 건 솜사탕처럼 하얀 빛 때문만은 아닌가 봅니다. ‘눈이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오겠지.’ 아직 대한이 남았고, 또 보름이 더 지나야 입춘이지만 조바심치듯 눈을 기다리는 꼴이 혼자 생각에도 우스꽝스럽습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필자의 개인 의견이며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방석순

<저작권자 © 자유칼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